‘한 나라를 예속시키는 방법은 두 가지다. 하나는 칼로 하는 것이고 다른 하나는 빚으로 하는 것이다.’ 엘렌 호지슨 브라운이 자신의 저서 ‘달러’에서 존 애덤스 대통령의 말을 인용한 내용이다. 실제로 빚은 사람을 노예로 만든다. 일명 자발적 채무 노예.

 한국은행의 22일 발표에 따르면 지난해 4·4분기 말 가계부채가 912조9000억원에 달한다고 한다. 이 정도면 빚에 종속되지 않은 사람이 드물다는 것을 의미하고 우리 사회가 바로 자발적 채무 노예 사회라는 것을 말해준다.

 대다수 국민이 빚에 종속된 삶을 살게 된 이유는 개인들이 빚에 대한 경계심을 늦춘 탓도 있지만 더 근본적으로는 정책방향과 금융환경이 빚을 늘리게 하는 데 한몫했다는 것에 이견이 없을 것이다. 정책 실패의 대표적인 것이 바로 대출 규제 완화이다. 집에 투자하면 횡재할 수 있다는 투기적 욕구가 보편적인 대중 심리였을 때 저금리 빚은 투기적 욕구를 충족시킬 지렛대로 인식되기 충분했다.

 이러한 왜곡된 대중 심리를 다독이면서 자산시장과 신용시장이 팽창하지 않도록 통제하는 것이 정부의 역할이다. 그러나 정부는 지속적인 저금리 정책을 고수하고 심지어 대출 총액관리나 한도 규제를 해야 할 적기를 놓쳐버렸고, 심지어 2010년 10월에는 총부채상환비율(DTI) 규제를 한시적으로 폐지하기도 했다. 당시의 규제 완화 조치는 이후 한 분기 동안에만 주택담보대출을 10조원 증가시켰다.



 정부의 규제 완화 명분은 부동산시장 거래 활성화였다. 문제는 규제를 완화했으나 대출은 증가한 반면 애초 명분으로 삼은 부동산 거래는 활성화되지 않았다는 점이다. 이 점이 바로 정부가 가계대출의 심각성을 정확히 파악하고 있지 못하다는 것을 보여준다. 가계대출을 더 많이 받게 하면 냉각된 부동산 시장에 온기가 퍼질 것이란 정부의 기대는 현실을 제대로 해석하지 못한 것이다.

 현재 소득 5분위 계층(상위 20% 소득 계층)조차 전체 가구 중 77.4%가 빚을 보유하고 있다.(2011년 한국은행 가계금융조사) 즉 상위 계층조차 빚을 추가로 낼 여유가 없다는 것을 의미한다. 규제를 완화해도 고가의 주택을 빚을 내서 구입할 수 없다는 것이다. 따라서 부동산 거래 활성화를 위해 대출 규제를 완화하는 것은 이미 실효성이 없는 대책인 셈이다.

 오히려 최근 가계대출 동향에서 나타나는 문제, 즉 부동산 거래를 위한 빚이 아니라 부족한 생활비를 충당하기 위한 추가 대출만 늘어나면서 가계부채가 악성화될 위험이 크다.

 상황이 이러함에도 새누리당 원내대표는 지난 21일 원내대책회의에서 정부에 DTI 제도를 완화해야 한다는 취지의 발언을 하고, 3월 초 정부가 부동산 부양대책을 내놓을 것이란 예측이 언론을 통해 흘러나오는 것은 심각한 문제가 아닐 수 없다. 부양대책이 나올 것이란 소문은 주택 가격에 대한 기대심만 부추기고 그 기대심으로 투기적 욕구가 다시 고개를 들 위험이 있다. 이런 투기적 욕구는 그간 부동산 시장의 팽창으로 이익을 챙겨왔던 부동산업계와 건설업계에는 반가운 내용이다.

 그러나 가뜩이나 위기 상황에 처한 가계부채 문제를 더욱 크게 증폭시켜 결국 국민경제 전체를 극단의 위기상황으로 떼밀 수 있다. 이에 대해 참여연대는 23일 성명을 통해 “DTI 제도는 오히려 법제화해야 할 뿐 아니라 새누리당의 발언을 즉각 철회하고 가계부채 연착륙 대책 마련에 착수할 것”을 강력히 촉구하고 나섰다. 참여연대는 새누리당이 선거 국면에서 표를 겨냥한 규제 완화 조치를 취함으로써 가계부채의 구조적 위험성을 더욱 증대시키려 한다며 비판한다.

 새누리당이 규제를 완화하더라도 현재의 가계부채 위기 상황을 우려스럽게 진단하고 있는 금융권이 대출을 확대할지는 미지수다. 그러나 자칫 규제 완화 분위기에서 제1금융권은 여전히 보수적인 반면 고금리 대출만 확장될 것이 우려된다. 이것은 바로 파국으로 이어질 결정적인 조치가 될 수 있다. ‘표퓰리즘’이라고는 하지만 대단히 근시안적 인기영합에 지나지 않는다는 점을 놓치고 있는 것이 아닐까.

Posted by 제윤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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